화명초등학교_과거

1905년 을사늑약으로 망국의 위기가 코앞에 닥치자 교육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절박한 외침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우리 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던 교육혁명이 일어났다. 그 바람은 마을로부터 불어왔다. 방방곡곡의 마을 사람들이 민립 학교를 세워나갔다. 사립화명학교도 그 바람을 타고 1908년에 설립되었다. 대천마을의 윤대의, 장진원, 최유수가 초대 교장, 학감, 교감을 맡았다. 임원은 지역 출신으로 채웠고, 교사는 다른 고장에서 모셔 오다가 점차 졸업생을 임용하게되었다. 수업 연한은 예비과 1년, 본과 4년, 보습과 2년이었다. 11월 20일 개교식에는 입학생 50여 명이 참석하였다. 학교 이름 화명은 지역의 상징인 화산(華山, 화명정수장 뒷산)에다가 개명(開明)한다, 혹은 신명(神明)의 보살핌을 받는다는 의미를 더하여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이름은 나중에 여러 마을이 하나의 행정동으로 합쳐지면서 동 이름으로도 쓰이게 된다.

화명학교 설립에는 당시 화명, 금곡 지역 일곱 개 마을 주민들의 힘이 모였다. 마을들이 학교를 설립할 엄두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각각 공유 재산을 갖고 있었던 덕분이었다. 먼저, 각 마을에서 내어놓은 공유재산을 보면, 대천 580환, 화잠(와석) 576환, 공창 254환, 191환, 수정 60환, 용당 21환, 동원 20환이었다. 여기에 재산 정도에 따라 자발적으로 내어놓은 개인 기부금 598환을 더하여 2천 3백 환을 학교 설립 기금으로 모으기로 하였다. 교사는 대천마을과 와석마을사이 등성이(지금의 우신아파트 자리)의 600평 남짓한 대지 위에 세웠다. 한 해 학교 운영 경비로는 6백 환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건축비 8백 환을 뺀 1천 5백 환으로 대부 사업도 하고 구포저축주식회사 주식도 사서 해마다 450환의 수입을 얻고, 여기에 일곱 개 마을이 소유하던 산판에서 나오는 땔감 판매 수입 150환을 더하여 경비를 충당하기로 하였다.

당시 이 지역 주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현안은 곧잘 낙동강이 범람하여 강가의 너른 들이 물에 잠기는 일이었다. 특히 백포(지금의 롯데낙천대, 대우이안아파트 자리)는 땅이 낮아 농지로 이용하기 어려웠다. 이에 화명학교는 학교 기금으로 백포에 제방과 수문을 부설하여 농지를 확보하는 공사를 벌이고, 그 대신 백포 토지 소유자들에게 10년 동안 해마다 벼 40석을 학교에 납부하도록 하였다. 이렇듯 지역이 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학교는 지역의 발전을 이끌던 민립 화명학교는 그러나 1918년 4월 1일에 문을 닫고 만다. 일제는 한 면에 한 개의 학교를 세운다는 1면 1교 방침을 내세우며 화명학교를 강제 폐쇄하고 구포공립보통학교에 합병해버렸던 것이다. 사립화명학교는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5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했을 따름이지만 구포시장 삼일운동의 주역인 임봉래, 윤경, 류기호, 우리 나라 민중의료운동의 선구자 양봉근, 애향 교육자 권상덕 등 빼어난 인재를 길러내었을 뿐 아니라 주민자치에 바탕을 둔 교육자치의 귀감을 일구어내었다는 점에서 오래오래 되새겨질 것이다.

이귀원 대천마을학교 교장, 『대천마을신문』 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