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천천_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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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포원들(아랫들) 제방공사 모습 사진 박성태 소장

 / 대천천 제방, 일제강점기 사진

故 양만하 소장

낙동강 하류는 홍수가 매우 잦은 곳이었다. 삼랑진에서 물금까지는강 너비가 그 상류의 반으로 줄어드는 병목 구간을 이루고 있는 데다가 하류 강바닥의 기울기가 몹시 완만하여 강물이 빨리 빠져나가지 못하는데, 밀물 때에는 물금까지 바닷물이 치고 올라오는 까닭이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하반기에 접어들어 조선총독부는 낙동강 치수사업에 나섰다. 이른바 낙동강 일천식(一川式) 개수공사이다. 낙동강 하류는 흔히 삼차수라 하여 세 가닥으로 나뉘어 흘렀다. 구포 쪽으로 한 가닥이 흐르고 김해 선암 쪽으로 또 한 가닥이 흘렀고, 그 사이에 있는 대저도를 비롯한 여러 개의 섬들(지금의 강서구) 사이로도 강물이 흘렀다.

그런데 이제 파나마 운하 방식의 대동수문(대저수문)으로 선암 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막고 오직 구포 쪽으로만 흐르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게다가 녹산수문까지 놓아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하면 김해 쪽으로 8개 면에 걸쳐 홍수, 해일로부터 안전할 뿐만 아니라 서낙동강을 풍부한 농업용수로 활용할 수 있는 수만 정보의 기름진 평야를 얻을수 있다. 특히 강변의 갈대밭을 옥답으로 개간할 수 있었는데, 그 대부분은 일본인 대지주의 소유지였다. 이 공사가 진행되자 구포 쪽으로 흐르는 강물의 높이가 올라가게 된다. 그런데 총독부는 구포에서 엄궁까지만 제방을 쌓기로 하고 구포 위쪽은 계획에서 제외했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1933년에 대홍수가 들이닥쳐 화명 금곡 평야가 물에 잠겼다. 이에 화명 금곡 주민들은 동래군수와 경남지사, 총독부에 제방 증축을 진정하였다. 하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이듬해인 1934년 봄 다시 물난리가 들이닥쳤다. 보리 이삭 한 알 수확하지 못한 농민들은 보리밭이 물에 잠기는 것은 처음 겪는 일이며,  그리 큰 비가 아닌데도 수해를 겪은 것은 일천식 개수공사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해 여름에는 지난해보다 더 혹독한 대수재가 덮쳐 그나마 제방이 놓여 있던 구포조차 3분의 2가 수면에 잠겼다. 화명리만으로도 이재민은 1500여 명을 헤아렸다.

이태 뒤인 1936년 여름, 또 한 번 수마가 화명리를 할퀴고 갔다. 화명, 금곡 농민들은 더 이상 대표를 파견하여 진정서를 제출하는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실력 행사에 나섰다. 오백여명의 농민들이 8월 22일 아침에 당시 부산에 있던 경남도청을 향해 도보 시위를 벌였다. 구포에 이르렀을 때 부산경찰서 고등계주임과 구포경찰관주재소 경관들의 제지에 막혀 애초의 계획대로 되지는 못했으나, 화명, 금곡 쪽 낙동강과 대천천에 제방을 설치하라는 요구를 좀 더 강력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

이어 9월 25일 화명리 주민 육백여 명은 다시 구포가도에 장사진을치고 부산을 향해 도보 시위에 나섰다가 경관들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은 앞선 요구에다가 이듬해 보리 추수기까지 생활비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덧붙였다. 구포까지 도보 시위 단행, 마침내 윗들, 아랫들 제방이 놓였다.

이렇듯 화명리 농민들이 잇단 도보 시위를 단행한 뒤에야 총독부는 애초의 공사 계획을 수정하여 구포 위쪽으로 제방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낙동강 개수공사는 애초 계획보다 2년 더 연장되어 1940년 10월 21일 준공되었다.

화명 금곡 사람들은 강가의 평야를, 대천천을 경계로 위쪽을 윗들(모리원. 지금의 한일유앤아이, 리버빌, 뜨란채 아파트 자리), 아래쪽을 아랫들(백포원. 지금의 롯데낙천대, 대우이안아파트 자리)이라 하였으므로 제방 이름도 윗들 제방, 아랫들 제방이라 불렀다. 그리고 윗들 제방은 대천천을 따라 올라와 지금의 경남아파트 앞까지 놓이게 되었으며, 아랫들 제방은 대천천을 따라 오르다가 그 지류인 용동천 쪽(북구보건소 뒤편)으로 빠져 올라가게 되었다.

용동천 쪽 제방은 이후 도시화 과정에서 사라져버렸고, 화명 금곡 쪽 낙동강 제방 위로는 2000년에 경부선 철길이 놓였다.

이귀원 대천마을학교 교장, 『대천마을신문』 9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