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명초등학교_권상덕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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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도에 화명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5년 해방 되던 해에 동래유락국민학교, 구포국민학교 교장을 거쳐 1946년 모교로 다시 돌아와 25년 동안 화명국민학교 교장으로 지냈 다. 왼쪽에서 두 번째 서 계신 분이 권상덕 교장선생님.

사진 박성태 소장

권상덕 선생은 1903년에 우리 마을에서 태어나 1975년에 우리 마을에 묻힌 ‘위대한 애향 교육자’이다. 사립 화명학교를 졸업하고, 밀양농업학교와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진주사범학교 강습과를 마친 그는 1926년에 교직에 나아갔다.

간이학교 시절의 화명초등학교에 봉직하다가 1946년에 2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교장으로 부임하자마자 음달의 마을회관 자리에 있던 협소한 교사를 지금의 터전으로 옮기는 공사에 착수했다. 주민, 학생들과 함께 손수 달구지와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서 교실을 신축하고 학교 앞 나무다리를 고치고, 운동장을 다지고, 교정에 나무를 심었다. 1948년 새 교사로 옮겨올 때 상계봉과 대천천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 넣은 학교 배지와 교가, 교훈을 지었다.

그 후 꼬박 22년 7개월 동안 오직 화명초등학교 한 곳에서만 재직하다가 1969년에 정년퇴임하였다. 학교에 출근하면 때 묻은 털모자, 낡은 국방색 잠바 차림으로 늘 학교 주변을 다니면서 쇠똥이며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워 방문객들이 학교 소사로 착각하였다고 한다. 제자들은 농사실습 교육과 협동 정신을 각별히 강조했던 권 교장 시절의학교 교육이 지금도 못내 그립다고 한다.

그는 지역에서 한결같은 존경을 받는 스승으로서 마을 발전을 위해서도 몸을 아끼지 않았다. 대천마을회관 건립, 대천마을개발계 창립과 운영, 대천노인회 설립 등 마을 역사 속의 크고 작은 일들에 발 벗

고 나섰다.

화명초등학교 교문 앞에는 빗돌이 하나 서 있다. 그가 운명한 1975년에 세워진 그 공덕비에는 “내 집보다 학교가 더 소중했고, 마을 걱정이 자신의 걱정이요, 학생의 근심이 자신의 근심”이었다고 그의 삶을 기리고 있다. 그가 평생 마음의 스승으로 모셨던 페스탈로치의 묘비명과 겹쳐져 큰 울림으로 가슴에 와 닿는다. “모든 것이 남을 위해서 였으며,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권상덕 선생의 무덤은 숲속그린아파트 107동 옆 어린이놀이터 너머, 굵은 적송들이 두레솔을 이루고 있는 곳에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무

덤과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대천리초등학교와 숲속그린아파트가 서 있는 곳을 옛 마을 사람들은 소바탕이라 불렀다. 집집에서 기르는 소들에게 풀을 뜯어 먹이는 마을 공동 방목장이란 뜻이다. 1940년 무렵에 산성로가 놓이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각각 아래소바탕, 윗소바탕으로 불렸는데, 권씨 집안의 선산은 윗소바탕에 있다.

권상덕 선생은 호를 바탕 소(素) 자, 골 곡(谷) 자를 써서 소곡이라 하였다. 이는 선산이 자리한 소바탕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앞 추모비에는 그가 퇴임사에서 “내가 죽으면 학교가 보이는 선산에 누워 학교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겠소.”라고 했다는데, 아파트에 가려 학교를 굽어볼 수는 없게 되었다.

올 여름 고 권상덕 교장 선생의 옛집이 헐렸다. 산성로를 사이에 두고 도예 갤러리 도랑과 마주보고 있던 그 집은 오랜 시간 돌보는 이 없이 방치되어 많이 쇠락하긴 하였으나 한말에 천석꾼 권규하가 지은 집으로서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는 마을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집으로 남아 있다. 두 그루 큰 회화나무로 대문을 대신한 멋스러움이 경탄을 자아내더니 이제 짝을 잃었다. 깊은 뒤뜰에는 갖가지 풀꽃과 나무가 정성스레 가꾸어져 집주인의 곰살스런 손길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역시 지워졌다.

뒤뜰 뒤편을 에워싸고 있던 아름드리나무들 가운데 느티나무들은 베어졌으나 팽나무와 회화나무들은 남았다. 바로 옆 숯불구이 집에 남은 뒤뜰 한 귀퉁이와 더불어 이 터가 간직한 아름다웠던 한때의 조각이나마 떠올려볼 수 있음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보다.

 백 살을 넘긴 집도 집이려니와 그 집이 우리 마을에 깃들어 살았던 권씨네 집안의 종가였으며, 마을의 잊힐 수 없는 은인인 고 권상덕 선생의 옛집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은 참으로 크다.

이귀원 대천마을학교 교장, 『대천마을신문』 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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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1963년, 권상덕 교장선생님 회갑일 사진 권배, 『할아버지와 나』,199/(우) 마을발전을 위해서도 몸을 아끼지 않으셨다.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 서 계신 분이 권상덕 교장선생님.

사진 박성태 소장

그때는 교장선생님이 인사이동도 없었는지 계속 교장선생님을 하셨어요. 요즘 같으면 아이들 학대라고 난리 날 건데, 교장선생님이 학교 운동장 이리저리 잘 다니셨는데, 신발을 등 뒤에 딱 숨기고 다니시다가 아이들이 쓰레기를 흘린다든지 뭔가를 잘 못하잖아요. 그러면 ‘야, 이리 온나’ 이럽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교장선생님이 오라니까 가지요. 그러면 선생님이 신발로 아이들을 ‘딱’ 때리거든요. 그때 안 맞은 애들이 없을 거예요. 그때는 학교에서 일도 많이 했어요. 각 반마다 돌아가며 누에도 치고 토끼도 기르고 옛날에는 돼지도 키웠다고 하더라고요. 지금 경남 아파트 자리에 뽕나무가 많이 있었어요. 거기 가서 누에 먹을 뽕잎 따 오고 했던 기억도 나요.

윤인자, 56세, 음달마을

 

단기 4296년 양력 2월 18일 (음력 정월 25일) 월요일 맑음

일기도 좋고 따시다. 봄이 왔나 싶다. 우차를 몰고 장에 갔다 온다. 교장선생 회갑에 상록계에서 알루미늄 밥통을 180원짜리를 사서 권상욱계원이 글을 쓴다. 석식 후에는 상록계원이 모여서 내일 권교장의 회갑일에 일 볼 부분을 책임 맡는다.

단기 4296년 양력 2월 19일 (음력 정월 26일) 화요일 맑았다 흐렸다

교장선생(권상덕) 회갑일. 우리 상록계에서도 밥통을 1개를 선물로서 드린다. 나는 접수를 맡아 종일토록 일을 본다. 이 근처에는 근래에 드문 성대한 환갑 잔치였다.

윤희수님 일기장에서 발췌, 196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