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명초등학교_과거

이 마을 출신자는 문맹자가 한 분도 없었어요

누 가 : 정우상(89), 윤희은(76)

언 제 : 2013년 6월 13일 목요일

어디서 : 대천마을회관

 

정우상 : 여기에 꼭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소. 해방되기 전에 몇 년 동안 일본 사람에게 지배를 받았소? 아요? 보통 36년이라 하지. 근데 34년 몇 개월 아니오? 그 지배 초기에 소위 우리나라에 교육개혁이 내렸거든. 지방에 소위 사학을 대원군이 폐쇄시켰잖소. 그러고 난 뒤 다시 학원에서 가르치기 위해서 교육령이 내렸거든. 그 초기에 초등학교 가르치는 자격을 줬어. 그 당시에 서울에 보성이나 양재, 동래중학교, 동래여고, 개성중학교, 개성고등학교 이게 다 그때 생겼거든. 그때 구포하고 화명에 학교를 만들었어요. 그때 만들 때 여기 사람들 화명 4개 부락하고 금곡 4개 부락, 8개 부락이 합동으로 해서 학교를 만들었어요. 만들고 나서 일 년에 두 번씩 보리 때는 보리를 내고 나락 때는나락 내고 해서 수업료 준비하고 해서 학교를 만들었는데 그 학교 자리가 바로 요(대천마을회관) 있어요. 그 학교에 제일 많이 다닌 사람들이 대천마을 사람들이었어요. 가르치는 선생도 여기서 제일 많이 나오고. 와석마을에 양봉근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그분이 화명학교에 선생을 한 2년 하다가 서울에 4년제 의전에 들어가가지고, 4학년 때 3·1운동을 하고 그 길로 바로 3·1운동 보고물을 가지고 내려왔어요. 자기가 가르쳤던 화명학교 중심으로 선생들을 만나가지고, 와석에 임봉래 씨를 만나서 “내가 혼자 맡을 테니까 나이도 제일 많고, 제일 아는 것도 많고. 자네들은 자네들 업무를 해라. 나중에 끌려가면 내 혼자끌고가면 되지. 너거는 다 안 했다 해라.” 하면서 만세운동 준비를 화명학교에서 다 했어요. 여기 졸업생, 선생, 이런 분들이 자기 가족에게 깃대 만들어라 하고. 그래가지고 구포 3·1만세운동 했잖소. 그래 하는데 실제 중심인물은 와석 임봉래인데, 여기 사람들이 숫자는 더 가담을 했는데 이 동네 전부 자기 혼자 다 맡고, 여는 잡혀 들어가서 다풀려났어요.

그 당시에 윤경이라는 분이 학교 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선생이 학교에 제일 오래 있었지. 그분이 만세 부르고 난 뒤에 구포 파출소 순사가 일주일마다 학교에 와서 요새 말로 대학교에 데모 하면 정보원들 가서 조사하잖소. 일주일마다 와서 학생동태, 선생동태 전부 보고하라 하니까 귀찮아서 못 하잖소. 그리고 자꾸 압박을 가하니까 학생들도 안 오고. 거기 가면 잡혀간다 이런 소문이 나가지고. 그래서 학생 수가 줄어서 학교가 유지 안 되잖소.마지막으로 구포학교하고 합병하고 나면 여기 애들이 구포까지 공부하러 가기 힘드니까 여기서 글을 배워야 되겠다 해서 그 당시에 야학을 처음 만들었어요. 여기가 처음 야학 자리였어요. 기역자 집이라. 옛날에는 야간학교라 했어요. 야간학교에 누가 관리를 했냐하면 윤경씨가 관리를 했어요. 학교 없어지니까 여기 마을 사람들이 그 학교는 안 가고 전부 다 야간학교 다 갔거든. 그때는 한문도 가르치고, 우리 한글도 가르치고, 수학도 간단한 거 배우면 되니까 여기 사람들이 전부 여기 학교 다녔고, 그래서 해방 되기 전에 문맹조사를 하니 이 마을 출신자는 문맹자가 한 분도 없어요. 글 모르는 사람은 다른 데서 시집 온 사람들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소위 문맹 없는 마을이었어요.

학교 선구자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때는 나이 많은 사람들은 야간학교 가고, 우리는 나이 작아가지고 주간학교를 또 만들었거든. 주간학교 1학년 초기 출신이오. 야간학교 인데 주간부라는 걸 만들어가지고. 주간부 제일 초기에 배워가지고그 다음에 구포학교를 갔어요. 대천야간학교지. 그때 땅은 땅대로 기부한 사람이 있고, 집 짓는 데는 지방 유지들이 여섯 명인가 이렇게 돈을 냈어요. 아주 부자가 김해서 이사 왔다는 김씨, 김재련 씨라고 일제시대 동래 군수도 하고 구포 읍장도 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터를 제공한 거지.

윤희은 : 이게 화명학교인데, 정식으로는 1943년일 거야 아마. 내가 여기서 해방되기 전에 1년을 공부했거든요. 그때는 정식으로 화명(공립)초등학교라.

정우상 : 그래가지고 1년 지나고 난 뒤에 그 이듬해부터 간이학교가 만들어졌어요. 간이학교가 2년이에요. 그래서 2년간 여기서 배웠어요. 그래 하다가 구포학교 분교 형태로 여기 2년 배워서 저쪽에 편입을 받았어요. 1년 하고 간 사람도 있고, 2년 하고 간 사람도 있어요. 여기는 해방되고 난 뒤에 이 마을 사람들이 옛날 화명학교 없어지니 우리도 학교 만들자 해서 이 마을이 주동이 되어가지고 소위 8개동 있잖소? 금곡 4개 동하고 화명 4개 동, 8개 동이 합해가지고 소위 화명학교, 사립학교 비슷하게 공립학교를 만들었어요.

 

윤희은 : 내가 화명학교 3회인데, 3회까지 이 학교 짓는 데 노역을 많이 했어요. 그때는 벽돌도 없고, 자갈하고 모래하고 싣고, 구르마—옛날에는 구르마라 했어요—달구지, 소를 끌어 밀고, 자갈 싣고 오고,모래 싣고 오고, 우리 노역 많이 했어요. 공부하는 것보다 오히려 일을 더 많이 했어요. 여기 학교는 사실 국가의 혜택을 그렇게 많이 보지 못했다고. 그러고 난 뒤에 학교는 그때 시작할 때니까 학교에 돈을 내야 하거든. 기성회 비를 많이 냈다고. 시골학교니 기성회비가 각 학교 계산을 해가지고 정부에서 잡비 용도를 안 해주잖아. 안 해주니까 여기서는 기성회비를 거둘 수가 없잖아.

그 당시 권상덕 교장이 이 문제를 해결하자 해가지고 경남아파트 자리, 논을 700평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사가지고 여기 나오는 수고금을 기성회비에 보태 쓰라고 기성회비에 넣었는데 아까 이야기했던 이가라는 교장이 학교에서 이때까지 세금을 냈는데 이게 학교 땅입니다, 지방 땅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소송을 해서, 교육청에서 좋은 소리 들었다 하고, 소송을 해가지고, 부산시 소유로 만들어가지고, 가지고 있으면 될 건데 1년 후에 그걸 다른 데 팔아가지고…….

 

윤희은 : 그게 공립이기 때문에, 공립은 사유재산이 없다. 학교자체로서. 그래서 두 번을 뺏겼어. 논도 뺏기고, 산도 뺏기고.

 

정우상 : 그 좋은 일 해놓은 걸 전부 다 허사를 만들었어.

 

윤희은 : 우리가 논 사는 데 옛날에 이삭 주우러 많이 다녔거든. 이삭이만큼 주워가지고 학교로 간다고 그 논 사는 데 보태고 했어요. 그게 참 옛날이야기이지. 내가 그 학교 지을 때 2학년인데, 2학년이 구르마 끌고 자갈 싣고 다녔으면 요새는…….

 

정우상 : 여기에 우리 한 대 위에 사람들은 그만큼 애들 교육시키는 데 애착이 강했다고.

 

윤희은 : 여기 간이학교에 주간도 있고, 야간도 있어놓으니까 그때 여기 있는 여자들도, 그 당시에 시집온 사람들도 여기 야간학교에서 배웠지.

 

정우상 : 야간은 아줌마 가르치고, 밤에 말하자면 봉사하는 아르바이트 선생들 통해서 나이 많은 할매도 자기 손자에게 편지 쓸 정도는 되고.

 

윤희은 : 그거 보면 우리 동네가 옛날부터 발전이 참 많이 되었어. 요새 텔레비전에 보니까 촌에 가니 할매들 아직 한글을 몰라가지고 가르치는 그거 나오데. 가끔 소개하잖아.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21세기에 그런 게 나온단 말이야. 우리 여기는 일제시대 때부터 전부다 여자들 공부 가르치고 그랬어.